싱글맨

under 영상 2010. 6. 12. 22:12
디자이너 톰 포드의 감독 데뷔작으로 꽤 화제가 되었던 작품인 것 같은데, 역시나 기대(=예상)했던 대로 상당히 스타일리시했다. 실제로 왕가위를 염두에 뒀는지는 몰라도 '화양연화'를 연상시키는 음악도 그랬고, 군데군데 왕가위의 기법을 연상시키는 화면이 눈에 띄기도 한 것 같다. 그런 미학적 요소들이 과도하다거나 서사를 압도한다는 느낌을 주는 장면들도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공감할 만한 영화였다. 주인공들의 운명의 측면에서만 보면, 10년쯤 전에 비슷한 일본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영화 제목은 자살관광버스) 그 시절에 그 결론을 대할 때의 나와 지금의 나의 태도는 달라진 것 같다. 젊어서는(? 지금은 늙었냐???) 운명론이라는 것을 마치 무슨 질병인 양 취급했던 것도 같은데, 나이가 든 탓일까. 훨씬 운명론자에 가까워지고, 그런 나를 굳이 변명하겠다거나 회피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운명을 거스를 수 있을 것처럼 덤벼드는 것이 인간의 오만함 같다는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그래서 영화의 결말에 대해서도 허탈감이나 무력감보다는, 그래 아마도 삶이란 그런 것이겠지,라며 어느 순간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삶이란 아마도 그런 것이리라.




비록 삶에는 콜린 퍼스 같은 영문과/인문대 교수는 없을 듯하지만- ㅋ


Posted by papy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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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선 (責善)

under 단상 2010. 5. 20. 00:53

아주 넓게 포괄해서 동양고전이라고 통칭되는 범주에 속하는 책들의 편제는 현대의 우리가 책을 쓰는 것처럼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일차적으로는 책에서 '말을 하고 있는 주체'가 저자가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에, 책상 앞에 자리잡고 앉아서 초고를 쓴 뒤에 자신의 생각의 흐름과 주제 등에 따라 배열하고 교정하는 과정을 거쳐 나온 책이 아니라 그럴 것이다. 제자들을 앞에 두고 강의한 내용을 제자들이 암기를 하거나 메모를 해서 기록했다가 엮어서 책으로 낸 '어록'들이 대표적으로 그런 것이며, 직접 쓴 경우라고 해도 일관된 주제에 관한 단행본 개념의 책이 나온 것은 상당히 후대의 일이었을 뿐, 대부분 평생에 걸쳐 쓰여져 축적된 원고를 저자 사후에 편집해서 펴냈다.

그래서 주제에 따라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거나,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것은 '별로' 기대할 수 없다. 물론 그런 고려 하나 없이 무작위로 묶었다는 건 아니다. 어차피 그런 책들의 경우 후대에 묶었기 때문에, 후대의 독자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방식으로 편집을 하긴 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나마도 비슷한 주제 아래서 논의된 이야기들을 한 장(章) 안에 담아주거나, 어느 정도 시간적 순서를 고려해서 배열해 그 사람의 생각이 진전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정도로만 묶어놨어도 고마워해야 할 지경인 경우가 많다. 어쨌든 이런 이야기를 꺼낸 건, 물론 그 어떤 종류의 글이나 책을 읽더라도 그것이 빚지고 있는 기존의 전통이나 전 시대의 작가, 시대적 배경 등을 통해 그 글을 보아야 하는 맥락이 없는 경우는 없지만, 무엇보다 동양의 책을 읽을 때면, 어떤 개념이 별다른 설명 없이 여기저기 흩어진 형태로 반복돼서 나올 때, 스스로 그 연결고리를 만들어 생각을 진척시키고, 일종의 '사유의 지도'를 만들어가며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중국 명대의 유학자인 왕양명(본명: 왕수인)이라는 사람에 관한 전기를 읽다가 그가 주창했던 많은 가르침들 가운데 '책선(責善)'이라는 개념을 접한 뒤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역사적 정황은 내가 잘 모르니 간략하게만 정리하겠다. 1506년에 그는 아무도 진실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 상황에서 혼자 왕에게 간언을 하다가 끝내 정치적 희생물이 되어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머물게 된 유배지에서 그는 자신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외부 세계와 폭력적으로 조우했을 때, 과연 자신을 방기하지 않고 '성인(聖人)'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도달한 그의 배움의 방법론은, 스스로 뜻을 세우고(입지:立志), 부지런히 공부하고(근학:勤學), 자신의 잘못을 고치고(개과:改過), 또한 착한 일을 하도록 견책하는(책선:責善) 것이었다.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 209-10)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배움이 혼자 뜻을 세워 부지런히 공부하고 잘못했을 때 고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거기에는 '책선[각주:]'[각주:1]한다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나는 그것이 그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을 염두에 둔 방법론이라고 생각한다. '책선'이란 말에 대한 개념어 풀이나 실천방법이 바로 설명으로 이어져 나오진 않았다. 그런데 그의 다른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언 제나 쉽게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양명]선생께서 그에게 주의를 주면서 말씀하셨다: 학문은 반드시 자기에게 돌이켜야 한다. 만약 부질없이 다른 사람을 책망한다면, 다른 사람이 옳지 않은 것만을 보고 자기의 잘못은 보지 못하게 된다. 만약 자기에게 돌이킬 수 있다면 자기에게 미진한 곳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게 되니, 어느 겨를에 다른 사람을 책망하겠는가? 순임금은 상의 오만함을 변화시킬 수 있었는데, 그 비결은 오직 상의 옳지 않은 점을 보지 않은 데 있었다. 만약 순임금이 그의 간악함을 바로잡으려고만 했다면 상의 옳지 않은 점을 보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상은 오만한 사람이라 반드시 굽히려고 하지 않았을 것인데, 어떻게 그를 감화시킬 수 있었겠는가. (중략) 지금부터 그대는 단지 다른 사람의 시비를 논하려고 하지 말라. 무릇 다른 사람을 책망하고 비판하려고 할 바로 그때에는 그것을 자기의 커다란 사사로움으로 간주해서 극복하여 제거해야 한다. (『전습록』, 699)


'책선'이라는 개념어에 대한 풀이로써 등장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양명이 주창했던 '책선'이란 개념에 대한 하나의 실천지침을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선'이란 개념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사유의 지도'를 그려본다면 포함될 하나의 '이정표'나 '랜드마크'일 듯하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들 누구나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한다. 그때 우리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떳떳하면 충분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왕양명이 말하는 순임금의 방법은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인용문에서 언급된 '상(象)'이란 인물은, 중국 고대의 대표적인 성왕이라고 알려진 순임금의 이복동생이었는데, 순임금과는 달리 오만하고 간악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선악이나 우열의 구분이 분명해 보이는 경우,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을, 이른 바 도덕적으로 정당한 권위를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책망하고 단죄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 게 우리들 인간이다. 또는, 친구의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지적해 줄 수 있고, 그 비판이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원리적으로' 배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지적이나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문제가 되는 자신의 기질이 '오만함'이라거나 '고집스러움'이라면 어떨까? '오만함'이나 '고집스러움' 같은 종류의 성품상의 결함인 경우, 양명이 지적한 바대로 바로 그 오만함 때문에 굽히질 않을 것이다. 그게 바로 정의상 오만하다거나 고집스럽다는 뜻 아닌가?

그렇다고 단지 그 때문에 상대의 잘못을 보지 말라,고 양명이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혹은 친구의 잘못을 눈감아 주고 넘어가도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 같다. 그럴 거라면 굳이 '책선'이라는 것을 그가 주창한 공부의 방법론에 포함시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상대의 잘못을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 방법이 그것을 직접적으로 지적해서 면박을 주는 데 그치는 것이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가 상대의 잘못을 지적할 때 우린 언제나 진심으로 그 사람을 걱정하고 변화시키고 싶은 생각에서 하는 걸까. 오히려 잘못된 걸 짚어내고 꾸짖는 '우월한 입장'에서 오는 쾌감과 우월감으로 하는 것은 아닐까. 상대방이 틀렸고 내가 맞았다는 걸 입증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닌가 하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명의 '책선'은 '꾸짖음(責)'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하게 되도록(善)'에 있는 것 같다. 정말 선하게 되도록 바꾸고 싶다면 어떤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까,에 대한 고민인 것이다. 그것은 '계몽적인' 태도로 상대를 '교정의 대상'으로 보고, 내 입장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책(責)'을 문자 그대로의 꾸짖음이나 야단침으로만 보아서, 상대를 대할 때 우월한 자로서의 나의 자의식이나 자만이 자리를 꿰차고 앉아서는 안 된다. 혹은 충고라는 말로, 상대에 대한 자신의 분노나 불만을 단지 배설하는 행위를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

누구나 언제든 고쳐야 할 잘못이 있고, 그것은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오만함을 고치겠다고 하면서, 그 상대방의 오만함을 고칠 때의 자신의 태도가 오만하다면 그건 이율배반일 것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바꾸고 싶다면서, 일회성으로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나는 할 말, 할 도리를 했다'라고 자만하고 위안할 바에야 그건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바꾸고 싶다면, 그의 마음이 감화될 수 있도록, 자신의 그런 진심이 전달될 수 있는 방식으로 스스로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멀찍이 떨어져 있는 방관자로 바라보다가 원론적으로 맞는 몇 마디를 던져주는 것으론 충분치 않다. 누군가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 그리고 무엇보다 진심과 애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내가 '친구'가 아닌 사람의 비판을, 그저 악의적인 독설로 받아들일 뿐 믿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사실은 내 오만함으로 상대의 단점을 지적하는 쾌감을 즐기는 것이면서 마치 상대가 잘못될까 봐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비겁하게 변명하려는 태도를 스스로 경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 책선(責善)이란 글자 그대로 풀면 '선함을 꾸짖는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착한 것을 야단친다는 뜻이 아니다. 도리어, '선해지도록 질책한다', 즉, '꾸짖어서라도 선하게 되도록 독려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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