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를 내보진 않았지만,
한중일 동양 삼국의 유학사에서 유사 이래 가장 많이 인용되는 고사가 있다면 아마도 백이숙제의 고사일 것이다. (동양, 서양 이런
말 사용하면 자꾸 '오리엔탈리즘'이 의식되는데, 사실 달리 뭐라고 지칭해야 할지도 몰라서 그냥 쓴다.) 어쩌면 '백이전'[각주:1]이라는 것을 하나의 '장르'로 구분해도 좋다 싶을 만큼, 사마천 이래로 많은 지식인들과 철학자,
문필가들이 이 역사적 인물과 사건이 시사하는 주제를 두고 자신의 문제의식을 개진한 글을 썼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숙종과 장희빈
시대의 서사가 드라마에서 끊임없이 변주-엄밀히 말하자면, 재탕-되는 것만큼이나, 동양의 역사에서 백이, 숙제 형제와 무왕, 주공을
둘러싼 문제는 자주 언급되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야말로 유학에서 중시하는 충과 효의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각자가 표방하는 인(仁)의 문제가 충돌할 경우, 각자의 입장에서 어떤 식으로 정당성을 확보하고 최선을 행할 것인가를 가장
첨예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들을 둘러싼 고사를 짧게만 소개하자면, [#M_이렇다. |접기|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고죽국(孤竹國)의 왕 고죽군(孤竹君)의 아들들이었다. 그 당시 왕은 자신의 아들들 가운데 막내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고, 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렸던 큰아들 백이는 맏이인 자신이 나라에 계속 남아있으면 혹 아우의 왕위 선양에 걸림될이 될까
저어하여 자기 나라를 떠나기로 한다. 이에 동생인 숙제 역시도 큰형을 제치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여겨 역시
왕위를 물려받지 않고 형과 함께 나라를 떠난다. (결국 어부지리로 둘째가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거?)[각주:2] 이들은 은나라의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던 주나라의 왕인 '창(昌: 이
사람이 문왕(文王)'이 '노인을 잘 모신다'는 소문을 듣고 주나라로 향한다.
그러나 웬 운명의 장난인지 이들이 주(周)나라에 도착했을 땐 창은 죽고,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무왕(武王)이 아버지의
삼년상도 다 치르지 않은 채로, 천자의 나라인 은나라의 주왕(紂王)이 포악하다는
이유로 그를 치기 위해 전쟁터로 나서는 길이었다. 이에 백이와 숙제는 길을 떠나려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들고 '아버지의 장례도 채 다
치르기 전에 무기를 손에 잡는 것은 효가 아니며,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려 하는 것은 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왕에게 간하여 그를
말려 본다. 주위에서 그들을 죽이려 하자, 주나라의 재상이었던 주공(周公)이 개입하여 '이들은 인한 이들이다'라고 주위를 제지하고
그들이 떠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는 불인한 군주의 나라인 주나라에서 나는 곡식조차 먹지 않겠다고 수양산으로 들어간 백이와
숙제는 그곳에서 고사리만 뜯어먹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왕은 주왕의 폭정 아래 허덕이던 백성들의 환영까지 받으며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 '주나라'로 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한다.
대강 요약해놓으면 이렇게 한 바닥밖에 안 되는 일련의 역사적 사건은 그러나 유학적 관점에선 여러 층위의 문제를 안고 있다. 즉,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왕에게 '인(仁)한 선택'을 하라고 간언한 백이, 숙제의 충(忠), 그리고 아버지의 상도 미처 치르지
않고 손에 피를 묻히러 나서는 무왕에 대해 그들이 제기한 불효의 문제, 그리고 제후인 무왕이 천자로부터 정통성을 받은 은나라의
황제인 주왕을 침으로써 발생하는 불인/불충의 문제.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웃 나라의 백성들이 왕의 폭정에 시달린다면 그 나라가 곧
천자의 나라라고 해도 쳐서 백성들에게 선정을, 즉 인을 더 널리 베풀려 했던 무왕의 입장. 그리고 그 입장이 이미 '정통'으로
인정된 시대에 살아가면서 글을 쓰는 후대의 역사가와 지식인으로서 주나라와 무왕의 '정통성'을 전복하거나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충신
백이와 숙제의 행위를 인정해야 하는 미묘한 문제. 그리고 그런 입장의 사이에서 '이들은 인(仁)한 자들이다'라며 백이, 숙제를
살리고, 무왕의 정벌전쟁도 역시 지지했던 주공의 입장. 이런 것들은 명백하게 같은 유교적 이념을 지지하고 계승하면서도 구체적인
사안에서 그것을 서로 다르게, 심지어 대립하는 양상으로 실천하게 될 때, 그런 긴장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후대의 유학자들에게도 줄곧 중요하고도 미묘한 사안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단종 폐위 사건을 두고 사육신 중 한 사람이었던 성삼문 같은 경우는, 백이, 숙제가 주나라 땅의 곡식을 먹는 것을
거부하고 수양산의 고사리만 먹다가 굶어죽었다는 사실을 두고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충신으로 숭앙받는 점마저 비판하며, 더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 '수양산의 고사리는 주나라 땅에서 난 것이 아니더냐, 고사리는 왜 먹었냐'라고까지 비판을 한다. 그런가 하면
연암 박지원은 기존의 문필가나 철학자들이 주로 무왕이나 백이-숙제의 입장 가운데 어느 한쪽의 관점을 취해 한쪽을 지지하고 다른
쪽을 비판하는 논지를 편 데 반해, 그 역사적 정황에서 무왕과 백이, 숙제 뿐 아니라, 그 사이에 개입했던 주공까지도 모두 각자의
'인'을 실천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다소 특이한 관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어쨌든 어느 한편을 선이라거나 악이라고 단정하기
힘든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각자가 자신의 정당성에 입각해 자신의 선택을 할 때 올 수 있는 긴장을 보여주는 점에서 이
사건은, 어떤 관점에선 다소 코미디 같은 상황이나 엉성해 보이는 서사의 구멍이 있긴 하지만, 중요한 사례임엔 틀림없다.
(이를테면, 아까 잠깐 언급했지만, 도대체 두 왕자가 모두 왕위를 거부하고서 자기들은 어진 왕을 모시겠다고 주나라로 도망을
가버리면, 고죽국의 운명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냐고? 게다가 생뚱맞게 나타난 이들 이방인 백이와 숙제가 전투 태세를 다 갖추고
출정하려는 왕의 말고삐를 난데없이 불들었다 어쨌다 하는 서술은 대체 뭐라고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고-)_M#]
<그린존>도 그런 재미가 있는 영화였다. 도대체 어느 편에 절대적인 역사적
정당성과 진실이 있는지 가려낼 수 없을 정도로 운명이 뒤엉킨 자들이 저마다 잣는 각자의 진실이, 운명이 교차하고 중첩되고
대립하는 짧은 찰나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재미. 영화를 관통하는 중심적 관점은 이라크전의 배후에 '감추어졌던 진실'을 파헤치는
일개 미군 준위가 제시한 용감한 대안역사의 서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일관된 관점보다, 매순간 다른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그들의 욕망--각자의 방식으로 '정당화된' 입장에서 자신의 관점을 관철시키기 위해 행동할 때, 묘하게도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같은 선택을 하기도 하고, 같은 편에 있을 듯한 사람들이 오히려 서로와 대립하게도 만드는 욕망--이 중첩되고
교차하고 대립하기도 하면서 그려내는 그 모호한 진실의 선들이 훨씬 부각되어 다가왔다.
물론 '백이전'과 '그린존'의 시선에는 차이가 있긴 하다. 자신이 정통성을 이어받은 왕조와 정신에 대한 이상화와 미화 작업의
일환이어서였는지 몰라도, '백이전'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관점은 그래도 기본적으로 호의적이다.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이
추구했던 충이나 인을 구현해 각자의 정당성을 획득했는가'를 이해하려는 것이 백이전을 바라보는 후대 지식인들의 관점이다. 그러나
'그린존'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훨씬 더 냉혹하다. 그는 비록 각각의 인물들이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하지만, 그들
각자의 진실은 그들의 정당성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 엇갈린 운명 속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욕망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두가 각자의 정당성을 추구한다고 하는 사이, 그들의 삶이 들려주기 시작하는 그들의 진실은 그것과는 또 다른 것이다.
혹은 그런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이는 인물들의 선택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선한 의도와는 어긋난 결과를 가져온다.
이라크에, 자신의 조국인 미국은 물론, 세계의 평화 전체를 뒤흔들 정도의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철석같이 믿고, 그
무기를 찾아내 독재자의 폭정 아래 희생되어가는 이라크도 구하고, 대량살상무기의 위협으로부터 미국과 세계를 구하려고 전쟁에 뛰어든
순진한(?) 미군의 상징과도 같은 로이 밀러(맷 데이먼) 준위. 그는 미국 정부에게 정보를 제공했다고 하는 미지의 이라크인
정보원 '마젤란'의 정보를 따라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하지만 세 번이나 연거푸 헛탕만 치면서 점점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프로젝트'의 실상 자체에 의혹을 품기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사담 후세인의 오른팔이었던 알 라위 장군과 전쟁 전에 이미 접촉해 대량살상무기 따위는 1991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불편한 진실'을 미리 접했던 파운드스톤으로 대표되는 미국 정부 고위층은, 그 사실을 은폐한 채 '마젤란'이라는 가짜
정보원까지 지어내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거짓 정보를 언론에 뿌린다. 그렇게 해서 자국의 국민인 '미군'을 헛수고하게 하면서까지,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감행하여 정작 그들이 노리는 결과는, 이라크 내 군부세력을 몰아내고 대신
자신들이 원하는 인물을 심어 이라크를 대리통치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정부의 계획은 알지도 못한 채, 밀러 준위나, 그에게 우연히 알 라위 장군의 비밀회동 장소를 알려준 이라크의 민간인 프레디나
모두, 각자 자기 나라를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삶을 위해, 미래를 위해 선택을 내린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밀러 준위는 전쟁의
진실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자신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수호하고자 했던
국가의 입장과 서로 다른 종류의 긴장과 대립을 일으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명시적으로는 '적군'의 위치에 서 있는
밀러와 프레디의 자리가 오히려 포개지는가 하면, 조국을 위해 전쟁에 나선 밀러는 오히려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제 나라 '아군'의
군대와 홀로 맞서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그 와중에 파운드스톤에게서 수상한 깸새를 챈 CIA의 마틴 브라운 국장과,
그에게서 독점적으로 '마젤란'의 정보를 제공받아 기사를 썼던 기자 로렌 데인. 그리고 사담 후세인이 사라진 혼란한 정국에 각자
자기 몫을 저울질하는 이라크의 알 라위 장군과 꼭두각시 정부의 주요인사인 주비아디 등의 욕망도 엇갈린다. 그 순간마다 그들을
움직인 것이 과연 적군과 아군을 갈라놓은 첨예한 '전선(戰線)'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밀러가 미국 정부의 허위를 폭로할 유일한 증인인 알 라위를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생포한 순간, 도리어 이라크인 프레디가 제
손으로 한때는 제 나라의 통치권자 중 하나였던 알 라위를 죽인다. 애초에 프레디는 '미국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기지 않고'
이라크인이 쓰는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선, 사담 후세인의 그늘에서 폭정을 도와 이라크인들을 억압했던 알 라위는 더 이상 정권에
앉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 그의 비밀회동 장소를 미군에게 제공해 그를 끌어내리려 했던 것인데, 밀러가 알 라위를
미군에 넘겨준다면 그가 미군과의 '거래'를 통해 다시 정권을 쥘 것을 우려해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라크의 자치를
염원하여 알 라위에게 총을 겨눴던 프레디는 사실, 자신의 선택이 결국 '미국이 직접 고른' 꼭두각시 정부의 수뇌인 주비아디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밑거름이 되리라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은 미군에게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하고 자못 비장하게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진실을 밝혔건만 진실은 은페당한 채 미군의
시나리오에 의해 이라크의 역사가 좌지우지되는 데 이르렀다며, 마치 자신은 '결백한 양' 미군을 비판하는 알 라위도 사실,
사담이라는 호랑이가 사라진 틈을 타 혼란한 정국에서 한 자리 꿰찰 요량으로 자기 욕심을 차린 데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는 결국 자신이 원했던 정권을 손에 넣지 못한 채 자기 나라 국민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다만 이 영화의 묘미는 알 라위를
미국의 시선에서 일방적으로 정당성이 결여된 '악의 축'의 주도적 인물로만 그리지 않고, 어찌 됐든 미국이라는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하는 제3세계 국가의 통치자의 입장을 반영해서 표현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같이, 시비나 선악을 떠나 모두가 주어진 운명을 벗어나 각자의 운명을 개척하려했만 결국엔 운명의 거미줄에
엉킨 채 오히려 벗어날래도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들어갈 뿐이란 점에서, 오이디푸스나 햄릿과 같은
비극의 인물들인 것도 같다.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려는' 몸부림 속에서 기실 그들은 그들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운명의
장난에 의해 '선택당할' 뿐이다. 정권을 노렸던 알 라위가 죽음에 이른 것이나, 조국의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며 알 라위에게 총을
겨누었을 프레디의 선택이 결국 미국의 계획을 순조롭게 진행시켜주는 데 기여했을 뿐인 것이나, 모두. 심지어 마치 역사를 쥐고
흔들며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마침내 이룬 것만 같은 승리감에 도취했던 파운드스톤마저도, 눈엣가시였던 알 라위가 참으로 편리하게도
미군이 아닌 이라크 국민의 손에 죽고, 자신들이 선택한 주비아디에 의해 매끄럽게 통치될 줄 알았던 이라크가 온갖 민족들 간의
분쟁과 대립이 고스란히 드러난 아비규환 속에 다시 던져진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는다.
영화는 비록 '2003년 후세인 정권 붕괴 뒤 후세인이 사용하던 바그다드 궁을 개조한 미군의 특별 경계구역으로, 미군 사령부 및
이라크 정부청사가 자리한 전쟁터 속의 안전지대' 인 '그린존'을 제목으로 택했지만, 실은 그 '그린존'의 담장 안쪽에 안전하게
들어앉은 자들은 마치 존재하지조차 않는 양 취급했던 잔혹한 전쟁의 실상을 보여준다. 단일한 진실에 대한 권위를 차지한 자들이
칠하려는 '초록' 일색의 '지대'에서, 불편하게 스며 나오는 어둡고 검붉은 핏빛 진실들. 그리하여 그 잔혹한 '킬링
필드(killing field)'에선, 운명의 장난에 놀아나다 드러나게 된 것이든 아니든, 모두에게 그들 각자의 '진실'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전쟁은 바로 그런 각자의 진실이 부딪치고 깨지며 날것의 제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누군가는 명목상
승리하고 누군가는 패배할 때조차도, 사실 승자도 패자도 없다. 어떤 의미에선 승자 없는 패자들만의 공간이 전쟁터다. 그곳에선 그저
각자의 정당성을 마지막까지 움켜쥐고 '어쩔 수 없었다',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 뒤에 몸을 숨기려 했던 이들 모두의 진실과
운명이 짧은 찰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사라질 뿐.
형제의
고사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형제의 이름을 모두 따서 '백이숙제전'이라고 지칭하기보다 '백이전(伯夷傳)'이라고 짧게만 지칭한다.
[본문으로]
당시엔
아들들의 이름을 지을 때, 첫째면 '맏이'라는 뜻의 '백(伯)'을, 그 아래부터는 둘째면 '중(仲)', 셋째면 '숙(叔)', 그
다음엔 '계(季)'를 넣어 이름을 짓는 것이 일종의 관습이었다. 그러니 이름에 이 글자 가운데 하나가 들어가 있다면 그것을 통해
형제의 서열을 짐작 수 있다. 백이, 숙제에 관한 최초의 역사적 서술이라 할 수 있는 사마천의 <백이열전>엔 둘째
아들에 대한 언급이 나오진 않지만, 이런 관습에 따른다면 백이와 숙제 사이에 다른 형제가 하나 더 있었을 거라는 걸 짐작해 볼 순
있다. 왕위 선양 과정에서 언급이 되지 않은 건, 그 당시 살아있지 않아서였는지 왕 후보로 거론되지도 못할 정도로 그릇이
작아서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본문으로]
* 스포일러 있음. (줄거리 노출 안 시키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쓰고 싶은데, 항상 쉽지가 않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보면서 '메릴 스트립이 저렇게 예뻤던가!'라는 생각에 몹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보았을 때만 해도 이미 내겐 중견 배우(좀 심했나?)의 인상을 주었던 메릴
스트립은, 연기력은 뛰어난지 몰라도 미모가 출중한 배우는 아니었다. 게다가 전성기 때의 '미모'를 자랑하던 로버트 레드포드와 함께
나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녀는 외모로 보면 이미 많이 지고 들어가야 했다...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꽤
오랫동안 그녀가 배우가 된 것은 순전히 연기력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죽어야 사는 여자> 같은 영화에
그녀가 나온 걸 봤을 때는, '저 사람 어딘지 괴기스러운 구석이 있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서 보게 된 그녀는 '청초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외모였다. 이상하게도 그 영화를
보고 나서 그녀에 대한 나의 호감도는 훨씬 더 상승했다. 한때 예뻤다고 해서 지금 다시 예뻐진 것도 아닌데, 왜 그 사실 때문에
지금의 모습까지 더 좋아하게 되는지, 나의 이 심리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본 이후,
메릴 스트립의 영화를 좀 더 관심있게 보게 되었다. (다이앤 키튼도 뒤늦게 <애니 홀>을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경우 중 하나였다.)
암튼 <줄리 앤 줄리아>가 그런 연유로 보게 된 영화 중 하나다. 일단 눈을 즐겁게 해주리라는 기대감을 품게 하는
'요리 영화'이기도 하고, 이런저런 경로로 접했던 총평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데다, 메릴 스트립 주연의 영화라고 하니 한 번쯤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과연 요리 영화이기도 하고, 메릴 스트립 주연 영화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멘토'과 '블로깅'에 관한 영화, 즉 마음의 스승을 벗삼아 글쓰기라는 자신의 영역을 만나고 만들어 가는 과정에 관한 영화였다.
불교에는 '줄탁동시(啐啄同時)'
혹은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말이 있다. 이
는 알 속에서 자란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상황을 비유한 표현이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선 우선 병아리 자신이
부리로 껍질 안쪽을 쪼아야 한다. '줄(啐: 우는 소리 줄)'이란
글자는 바로 이처럼 병아리가 알을 깨기
위해 안쪽에서 알껍질을 쪼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때 병아리 혼자서 알을 쪼고 안에서 발버둥친다고 해서 알이 깨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때 어미닭이, 품고 있는 알 속의 병아리가 부리로 쪼는 소리를 듣고 밖에서 알을 쪼아 새끼가 알을 깨는
행위를 도와주는데, '탁(啄: 쫄 탁)'
이 곧 어미닭이 밖에서 알을 쪼는 것을 가리킨다. '줄탁동시'란 바로 이처럼 그 두 가지 행위가 동시(同時)
에 혹은 같은 계기[同機]에 일어나야 병아리
한 마리가 비로소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상적인 사제 관계를 표현할 때 쓰인다. 이것을 줄여서
'줄탁'이라고도 한다.
인생에서 멘토란 존재, 그리고 멘티로서 자신이 배움을 얻고 세상을 여는 방식은 바로 이런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급
공무원으로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주인공 줄리가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책의 저자로만 알고 있던 줄리아 차일드와 만난
방식이다. (스포일러가 될 것은 알지만 오해를 막기 위해 미리 밝혀두자면, 여기서 '만남'은 축자적인 의미 그대로의 '만남'은
아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는 1949년의 줄리아 차일드와 2002년의 줄리 파웰의 삶이 교차편집해서 등장한다.
1949년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프랑스 파리에 살게 되면서 프랑스 요리와 사랑에 빠져 명문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에서 요리를
배우기 시작하고, 이후 최초로 (공저이긴 하나) 영어로 된 프랑스 요리책을 내고 직접 프랑스 요리를 가르치면서, 미국에 프랑스
요리를 전파한 전설의 미국인 프렌치 셰프, 줄리아 차일드의 삶. (헥헥- 숨차다^^;) 그리고 2002년을 살아가고 있는 줄리
파웰은, 어쩌면 줄리아 차일드와 비슷하게 남편의 직장을 따라 이사를 하게 되지만, 그것은 삶의 질이 올라가는 선택이라기보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쾌적했던 뉴욕 브루클린에서 퀸즈로 강등되어 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급 공무원으로서의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에 함몰하며 대학시절 꿈이었던 작가로서의 삶은 멀어져만 가는 것 같다. 게다가 우정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저 오래
알아왔다는 이유로 삶의 기준이나 방식도 완전히 다른 '엄친딸' 친구들과 갖는 정기적인 모임에서, 돌아가면서 해대는 그들을 자랑질을
참고 들어주는 고문을 당하며, 점점 깊은 자괴감에 빠져 평범하다 못해 루저(loser)로 전락해가는 듯이 느껴지는 줄리 파웰의
삶. 이 두 사람의 삶은 좀처럼 접점이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괴감과 일상에 함몰해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줄리가, 꼭 책을 내지 않아도 '블로그'를 통해 글을 쓸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격려하는 남편의 지원에 고무되어, 작가로서의 꿈을 현실에서 펼쳐볼 용기를 내면서 그들의 삶은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냥 무작정 일상을 기록하는 대신, 자신이 평소에도 일상의 비루함에 초라해질 때마다 그 책에 실린 프랑스 요리를 함으로써
삶의 활력을 되찾곤 했던, 줄리아 차일드의 <프랑스 요리 예술 마스터하기 (Mastering the Art of French
Cooking)>에 실린 524개의 레시피를 365일동안 전부 시도해보는 프로젝트를 스스로 기획하고, 그 여정을 블로그에
기록으로 남기기로 한다. 이 1년짜리 '줄리/줄리아 프로젝트'는 활력도 목표도 없던 그녀의 삶에 열정과 방향성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그녀의 블로그는 서서히, 그러나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얻게 된다.
그러나 누가 하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발벗고 나서서 시작한 일들이 종종 그러하듯, 어느 새 이 일은 주객이 전도가 되어
그녀의 삶을 옭아매기 시작한다. 자신과 남편의 삶의 기쁨을 위해 시작했던 일이 점점 그 본래 취지를 망각한 채 일종의 집착이
되면서, 직장생활과 블로그 운영을 동시에 해야 하는 고충과,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나 남편에 대한 불만이 쌓여 간다.
그리고 마침내 인기 블로거가 되면서 기대했던 편집장과의 만남이 무산돼 버리면서 그녀의 짜증은 폭발한다. 허나 그 순간 그녀는
깨닫는다. 글 쓰고 요리하는 것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 시작한 일이 어느 새 주변 사람과 바깥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한 하나의
노동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그러나 줄리는 자신이
단지 성공적인 요리 한 가지를 완성하거나, 잘난 글 한 편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줄리아 차일드의 레시피를 시도함으로써 그녀를
멘토 삼아 요리를 향한 열정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하고자 했던 그녀의 삶을 배우고자 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이 영화 속 '멘토'인 줄리아는 단 한 번도 줄리를 직접 지도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전형적인 '멘토'는 아닌 셈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줄리가 줄리아를 '멘토'라 지칭한 장면이 나온 것 같은데, 사실 내 기억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긴 하다.)
도리어 영화 막바지에 줄리의 요리 블로그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줄리가 신문에까지 실린 뒤, 온갖 출판사에서 빗발치듯 걸려오는
전화들 가운데 줄리아의 지인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통해 전해진 줄리아의 심경은, 줄리의 그런 경박한 시도에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에 처음엔 못내 실망했던 줄리는 '그 줄리아'의 생각에 자신이 연연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녀의 줄리아는 처음부터 줄리의 상상 속 줄리아였지만, 실제적으로 줄리의 삶을 구제(?)하고 성장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히 그녀에게는 고마운 존재였으며,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존재를 무결점의 존재로 우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 의미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사람과 '만나는' 것이며, 그 사람으로부터 배움을 구했다는 의미에서 '스승'으로
삼는 것이다. 그것으로 이미 그는 내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을 도와 바깥에서 알을 쪼아준, '줄탁'의 스승인 셈이다.
물론 줄리아를 직접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다하진 않았겠지만, 애초에 팬으로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라거나 그녀에게 승인받기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스승은 제자를 자기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이끄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스승은 제자의 요청을 통해 제자와
만나고 그 만남이 그들을 사제 관계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만난 뒤엔 스승은 무엇보다 제자가 스승만을 만나고 스승만을 통해
세상을 보게 만드는 대신, 스스로 세상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사방이 막혀있던 자신의 삶으로부터 출구를
찾아야 했을 때, 줄리의 줄리아는 자신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줄리에게 출구가 되어주었고, 그런 의미에서 멘토가 되어 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줄리는 자기의 협소하고 폐쇄된 세계를 뚫고 나와 세상과 만났다. 그것으로도 그녀, 줄리에겐 족했다.
이 영화가 시사하는 또 다른 재미는 바로 '블로그'라는 글쓰기 매체이자 공간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블로그가
줄리에게는 '책'이라는 좀 더 고전적이고 정통적인 글쓰기 매체로 건너가는 '발판'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출간과 그
이후의 삶이 아니라 출판계약까지의 과정만 나오는 이 영화는 블로그라는 매체를 통해 21세기의 인간이 세상과 만나고 이야기 나누며
삶이 변화하는 과정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많은 공감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블로그를 통해 많은 방문객을
얻고 소위 인기 블로거가 된다는 것이 물론 즐거울 수도 있다. (물론 매우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ㅋ) 그러나 블로그에 글을
쓰고 금방 달린 댓글에 희희낙락하는 것은, '
더 많은' 사람과의 만남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자신을 표현하는 그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과 관계의 결이
더 풍성해지는 데서 느끼는 기쁨이다.
물론 그런 존재가 없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줄리의 삶을 통해서 보자면, 댓글을 단 자기 블로그의 구독자와의 관계 같은 것이
나오진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삶의 풍성함은 항상 자신이 의존적이기만 하던 남편과의 관계가 바뀌고, 친구들을 초대해서 자신이 한
음식을 먹이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어머니와의 관계에서도 좀더 당당해지는 등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바뀌는 것을 통해
보여진다. 이는 아마도 블로그란 공간이, 사람들이 블로그 방문객 수를 헤아리는 데만 연연하거나, '책'이라는 정통적인 매체를 향한
일방적인 구애에만 매달리는 대신,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기쁨과 생동감을 얻는 것을 가능케
하는 공간이란 사실을 보여주는 것인 듯하다. 그것은 곧 블로그를 통해 저 세상 밖에 흩뿌려져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기뻐하기
이전에, 자신을 만나고 만들어가는 과정 그 자체의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마치 줄리의 '줄리/줄리아 프로젝트'가
줄리아의 승인을 얻는 것과 무관하게 줄리의 성장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었으며, 그래서 줄리아 차일드가 세상을 뜰 때까지
줄리가 그녀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해도, 좌절할 일이 아닌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