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동생이 들렀다 가면서 일러줘서 재미있게 보기 시작한 <매드 멘(Mad Men)>이라는 미드가 있다. 'Mad Men' 이란 뉴욕의 매디슨(Madison) 애비뉴를 중심으로 광고회사들이 성장하게 되면서, 그곳에서 일하던 광고업계 사람들이 1950년대부터 자신들을 지칭한 일종의 별칭(?) 같은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90년대 이후(로 잡으면 얼추 맞으려나?) 뉴욕의 '월 스트리트'가 금융가의 대명사가 된 것처럼 그 시대 미국의 광고업계의 대명사는 매디슨 애비뉴였던가 보다. 물론 광고/일에 '미친 사람들'이라는 중의적 의미도 고려하고, '광고쟁이들' 정도의 느낌으로 광고업계 사람들을 'ad men'이라고 부른다고 할 경우 그 발음과의 유사성도 염두에 둬서 붙여진 별칭일 것이라 짐작된다.
드라마는 60년대 '스털링-쿠퍼'라는 중간급 규모 광고회사의 유능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도널드 드레이퍼라는 사람의 삶을 중심으로 그 주변 인물들과 그 시대상을 그린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코믹한 요소가 있는 드라마를 즐겨 보는 편이긴 하지만, 이작품은 그런 명시적인 코미디 코드 없이도 정말 재미있다. 이 작품엔 희노애락의 모든 감정이 담겨 있되, 그것이 너무나 깊으면서도 또한 너무나 미묘하다는 것이 굉장한 매력이다. 작품 전체에선 거의 스치듯 지나간 한 인물, 드레이퍼의 아내인 베티에게 반해서 잠시 접근했던 --그 역시 이미 약혼녀가 있던-- 한 젊은 남자가 그녀를 표현하면서 했던 대사 가운데 "당신은 너무도 깊이슬퍼요."라는 것이 있었다.[각주:1] 물론 이 드라마의 주요 여성 배역 중 하나인 베티를 표현한, 한 조연의 대사이긴 했지만,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전체적인 정서를 표현하라고 한다면, 내게 그건 바로 '너무도 깊이 슬픈(so profoundly sad)'일 것이다.
전에 데이빗 그레이버의 어느 논문을 번역했을 때, 그런 사례를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자신이 접해본 인류학적 사례를, 어느 시대와 장소라고 꼭 짚지는 않은 채 언급했던 경우였던 것 같은데, 우리 현대인들이 '어떤 저명인사가 자기 지인들과 작당해서 속임수까지 동원해 크게 한 몫을 챙긴 뒤, 그걸 자기 자신이 챙기거나 주변사람들과 나눠갖는 대신 단지 자기가 싫어하는 어떤 사람을 망신주겠다는 보복의 의도로 그 돈을 그 사람에게 주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우리가 자신의 감정에 가장 충실한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는 삶의 방식을 전혀 배운 적도 없고, 그렇게 살아본 적도, 심지어 상상해본 적도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물론 그런 건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그야말로 주인공이 그런 상황을 '상상'하는 장면으로만 간혹 나온다. 그 상상에서 머리를 흔들고 자신을 깨운 뒤 대부분 그저 '해야할 바'대로 행동하는 장면으로 넘어가는 것도, 이제 영화나 드라마에선 일종의 상투적 장면이 되었다. 그런데 그처럼 그런 건 '머리 속으로 상상'이나 해야 하는 영역인 것이 우리에겐 당연해진 것이 또한 우리의 삶이다.) 그 때 그런 행동을 한 비자본주의 사회의 사람에게 더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그의 감정, 그의 자존심일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근대인들은 그런 행동을 아마도 그저 또 하나의 미개한 문명에서 행하는 유아적 행위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할 것 같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면 정말 그 말을, 그리고 그런 우리의 삶을 너무나 깊이 이해하게 된다. 가정에서의 불행과 공허감을 절대 남에게 보이지 않고 완벽하고 행복한 척 가장하는 법. 그러나 심지어 그 '불행'을 공유한 가족과도 그 '불행한' 차원에서조차 서로 합일되지 못한 채, 상대를 외면하고 끊임없이 시선과 육체가 다른 곳을 향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이나 신의를 지키려는 모든 시도들은 돈과 이익 앞에서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으로 묵살된 채, 돈과 이익을 위한 행동을 택하는 삶.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런 의미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살고자 하는 방식,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원칙, 존엄성, 혹은 자신의 감정 등은 모두 버리고, 뭔가 그 상황에서 얻게 될 직접적인 이익에 무게를 실어 그것을 지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원칙을 폐기하거나 자신의 성격을 은폐하거나 교정하는 것. 그것이 마땅히 '어른스러운' 행동이라 믿는 것.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는 정말 모든 세계가 '우리 같은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것만을 이상으로 삼고 있는 걸까. 그 안에서 자신의 공허감에 끝없이 잠식당한 채로.
주인공 도널드 드레이퍼는 (극에선 주로 Don이라고 줄여서 부르는데, 한글로 '돈'이라고 쓰려니 참 껄쩍지근하다. ㅋ) 광고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그 업계에 오래 몸담은 사람들에 비해 여전히 '순수하다'. 그래서 함께 오래 일한 동료를 꼬투리를 잡아 자르려는 상사들에게 반대의사도 표명해 보고, 더 큰 광고사와의 계약을 따기 위해 미리 계약했던 광고회사와의 신의를 저버리려는 상사들에게도 역시 저항해 본다. 그러나 저항의 결과는 매번 그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없는 상황들, 자신의 의지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가 직접 나가서 계약을 파기하고, 동료를 해고해야 하는 직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런 좌절이 계속 반복될 경우, 그는 과연 자신이 지키고 싶었던 원칙, 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회사의 상을 지키며 살아가는 인물이 될까. 그런 전망이 그렇게 밝아 보이진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홀로 '순수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다.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그녀하고만 함께 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방황하는 그 역시도 순수와는 거리가 멀다.
이 드라마 속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모두 그런 것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것을 정말 냉정하고도 건조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그래서 이 드라마는 너무, 깊이, 슬프다. 그렇지만 그것은 억누를 수 없는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그런 종류의 슬픔이
아니다. 차라리 이것이 슬픔인지 분노인지 연민인지 사랑인지조차 알 수 없는 그런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슬픔에 가깝다. 눈물이
조금 맺힐 것도 같고, 그러면서 입가에 묘한 미소, 혹은 냉소를 띄게 되는 것도 같고, 가슴 한켠이 아릿한 것도 먹먹한 것도
같은, 뭐 그런. 항상 말도 안 되는 '행복한 가정'의 헛된 표상만을 내보내는 프로파간다형 드라마나, 그런 삶의 허위를 과장된
감정으로 폭발시켜 보여주는 우리 나라 드라마들을 보다가, 그런 삶을 건조하고 미묘한 시선으로, 그러나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이
드라마를 보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다. 거기엔 어떤 미화도 없다. 이 드라마는 아름답지만, 아름답게 '꾸미지' 않았다.
'모두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요'라는 변명조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런 삶이 있고, 또한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나
자신이라는 생각에 어느 순간 한기 같은 걸 느낄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랑할 것도 미워할 것도, 포장할 것도 더 뒤집어 보일
것도 없다. 그걸 보여주는 데에 넘치는 것도, 모자란 것도 없다. 부패도, 타락도, 성적 탐닉도 모두 엄연히 존재하지만 결코
발설해선 안 될 'off the limit' 영역의 화제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동일시하는 대상인 '순수한' 주인공을 제외한-- 타락한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고발해야 할 범죄인
것처럼만 다루는 우리 나라 드라마와는 달리, 그 모든 것이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드라마의 논조는 확실히 무척 성숙하다. 그리고 이런 외관상의 '픽션'들이 논픽션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이점이 늘 그런 것일
텐데, 너무나 리얼해서 거의 다큐멘터리 같은 생각이 들어 불편해하며 이 작품을 공격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왜, 뭔가
켕기세요? 하지만 이건 픽션일 뿐인데요'라고 조소하고는 그런 비판 따위 가볍게 훌쩍 넘겨버릴 여지가 있다는 점이랄까.
올해까지 3시즌이 나왔고, 매 시즌은 딱 13편씩 사전제작되어 나온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만들지 않고, 사전제작이다 보니 당연히 시청자들의 입김에 의해 서사가 이리저리 휘청대는 일 따위는 전혀 없다. 그래서 매 회 하나하나가 정말 공이 많이 들어간 세공품 같다. 그리고 한 편, 한 편이 모두 완성도가 있지만, 그것이 각 인물들의 비밀을 양파껍질 벗기듯 한 겹씩 벗겨내면서 긴장을 고조시키고, 퍼즐의 조각을 맞춰 나가는 듯한 전체의 플롯 또한 굉장히 완성도가 높다. 그리고 60년대 미국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그다지 먼 과거는 아니지만, 그때의 의상이나 인테리어, 그리고 소품 등을 모두 고증하고 재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일종의 시대극에 들어갈 수도 있는데, 그런 미장센의 연출효과도 너무 훌륭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그 당시 다소 컬러풀하고 빈티지한 색채감을 좋아하는 탓도 있긴 하지만, 단지 예쁘고 다채롭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색채감과 드라마의 전체적 정서의 대비 같은 것이 무척 드라마틱하다. 난 단순히 기교적으로 미학적인 것은 오히려 과장된 자의식 과잉 같아서 부담스럽고 싫어하는 편인데, 이 드라마의 미장센은 정말 딱 적정선이라는 느낌이 든다.
시대극이란 점에서 분명 '향수'가 느껴지지만, 6,70년대를 다루는 우리 나라 드라마들처럼 복고적 감성에 한없이 침잠하지 않는다는 점도 좋다. 거기엔 분명한 거리,가 느껴진다. 흡연이나 음주가 일상화되었던 시대, 심리치료라는 것이 처음 도입된 시기에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그리고 심지어 인종주의라는 것이 여전히 일상적 차원에서는 당연시되고 묵인되고 있던 시대의 삶을 그대로 보고, 그 시대의 감성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게 만든다. 모든 사극이나 시대극이 기실 우리 현시대의 삶에 대한 빈약한 상상력을 60년대, 조선시대, 삼국시대 버전으로 복제해낸 것에 불과한 우리 드라마와는 달리, 이 드라마는 그 시대에 대해 분명한 거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지금의 삶에 대한 반성과 반영의 효과는 분명히 존재한다. 게다가 중간중간 그 당시의 삶을 뒤흔들었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접하는 사람들의 반응 같은 것이 서사의 흐름 안에 교묘하게 들어가 정교함을 더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들 모두가 연기를 잘한다는 것이 이 드라마의 최대의 미덕이다. 우리 나라처럼 오디션을 거치지 않고, 일단 예쁘고 잘 생기면 어디든 끼워넣은 뒤 그 사람에 맞추어 연기력을 타협하는 드라마가 아니라, 연기를 하기 위해 밑바닥부터 굴렀을 것이 분명한 배우들이, 그 배역을 위한 완벽한 연기자를 선별하려는 제작자들의 눈과 만나서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에, 정말 예쁘고 잘생긴 배우들'조차' 연기를 정말 잘 한다. 게다가 이 드라마 캐스팅의 묘미는 정말 그 시대에 매력적이었을 인물들을 뽑았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봐도 예쁘거나 매력적이긴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그레이스 켈리 같은 여배우나 험프리 보가트 같은 배우의 '고전적인' 매력을 간직했다는 의미에서이지, 21세기에 튀어나와 그 시대로 걸어들어간 배우들이 아니란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징후? 여배우들의 몸매가 정말 '모래시계'형이란 것!?^^ (특히 조안이라는 여비서 역할의 여인은 살짝 부담스러울 정도 ㅋ) 어쨌든 그 시대가 요즘 같은 깡마른 몸매가 대세가 아니었던 시대라는 점을 존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레이퍼의 세 명의 아이 중 유일한 딸이자 가장 큰 아이인 샐리. 너무 귀엽다 >_< 몸매도 정말 아이답게 통통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울고 웃는 것이 전부 연기라는 생각이 안 들 만큼 생동감이 있다.
[#M_샐리의 모습 확인하기 |접기|
이 사진은 극중에서 직접 나왔던 장면은 아니고, '슬라이드 프로젝터'가 처음 나온 이 시기에 그 광고를 맡았던 드레이퍼가 그것을, 우리의 기억 속으로 데려다 주는 타임머신 같은 것, 추억을 타는 회전목마와 같은 것이라는 기획안으로 광고주들에게 소개를 해줄 때 자신의 가족사진을 이용해 슬라이드쇼를 했던 장면에 사용되었던 드레이퍼의 가족 사진 중 하나였다. 앞의 딸 아이가 샐리, 뒷쪽에 있는 남자 아이가 샐리의 동생인 바비.
그리고 이 아이의 거침없는 생동감과 천진난만함은 너무 어어쁘면서도 한편으로 이 작품을 더욱 슬프게 만드는 것 가운데 하나다.
자기 주변의 어른들의 세상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한 채 마냥 천진난만하기만 한 아이들의 모습은,
어른들의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세계와 대비되면서 거의 비현실적이고 기괴하다는 느낌마저 줄 때가 있다. 저 세계 안에 도저히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저런 삶이 공존하고 있었구나,라는 자각.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우리의 어린 시절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 그런 요소까지 모두 정교하게 서사 안에 짜여들어가, 이 작품은 한 편의 복잡한 직조물 같기도 하고, 모자이크 같기도 하다.
이렇게 모든 면에서 정교한 예술품 같은 드라마 우리 나라에서도 좀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처음엔 끝없는 호기심 때문에 3시즌 초반까지 거의 쉬지 않고 봤는데, 4시즌이 올해 6월부터나 다시 방영될 예정이라, 다 보고 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 잠시 쉬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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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대사는 "You are so profoundly sad."라는 말이었는데, 이 'profound'라는 단어가 나에겐 아주 번역하기 까다롭게 느껴지는 단어 중 하나다. 대개 '깊다, 심오하다'로 표현되거나, 부사적으로 쓸 경우 '극심히, 완전하게' 등으로 활용하는데, 다 좀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있다. 특히 '심오하다'라고 하면 너무 있는 척하는 표현 같고, '깊다'고 하면 좀 어중간하게 느껴지고 그렇달까. 어쨌든 상응하는 단어를 찾는 차원이 아니라면, 'profound'라는 말이 내게 주는 느낌은 폐부를 깊숙히 찌르고 들어오는, 그런 깊이감을 주는 표현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본문으로]
미국의 라디오 방송 가운데는 "This American Life" 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우리 나라의 라디오 방송은 대부분 음악을
'소개'해 주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다소 획일적이라면 획일적인데, 미국은 거의 텔레비전 방송만큼이나 다양한 내용과 형식을 취하는
듯하다. (많이 들어보진 않아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이 라디오 방송은 일종의 라디오 르포 혹은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매 주 한 가지 주제를 정해서 그 주제에 맞는 내용을 취재하든, 제보를 받든, 픽션이나 넌픽션 서사를 선별하든 해서,
1시간동안 전달/소개하는 것이다. 다루는 주제 자체도 실연이나 가족 관계 등의 사적인 주제부터 시작해서, 정치, 경제, 학술적
분야의 대대적인 사건 등까지 광범위할 뿐 아니라, 한 가지 서사만으로 한 시간을 전부 채우는 것부터 자잘한 수십 가지 이야기를
하루 분량에 꽉꽉 채워넣는 등 다분히 고무줄 같은 면이 있다. (물론 서너 가지 정도의 이야기를 하루에 소개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한동안 열심히 듣다가 약간 시들해져서 잘 안 들었는데, 아무래도 한 시간 정도 분량이다 보니, 재미있는 내용이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탔을 때 음악 대신에 소일거리 삼아 들을 만하다. 오늘 들었던 주제는 일종의 '적과의 동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 중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패트릭 월'이라는 한 전직 신부의 이야기였다. 세인트 존 수도원에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고, 언젠가는
자신과 같은 소명을 가진 수도승들을 가르치는 신부가 되고 싶은 꿈을 간직하고 수도승으로서 공부를 하고 있던 그는, 1991년
26세의 나이에 생각지도 않았던 미션(?) 한 가지를 제안받는다. 그가 공부하고 있던 수도원의 기숙사 가운데 한 곳이었던
세인트메리 기숙사의 사감이 되어달라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요,라고 말하는 그에게 수도원 측에서는
바로 그날 일을 시작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갑작스럽게 그에게 그런 일을 맡기게 된 경위는 알고보니 바로 그 기숙사에서 벌어진
성추행 사건을 수습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신뢰가 갈 만한 인품과 학생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그는 그 일에
적임자였다. 그리고 그 일을 잘 해냈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일을 잘 해내자, 이후로 그에게 돌아오는 직무는 항상 그런 것이었다. 성직자로서의 '금욕'의 계율을 깬
신부의 자리를 교체하고 새로운 인물로 대체한 뒤, 성직자에 의한 성범죄 피해자들의 상담을 해주고,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질 경우
수습을 위해 그 일을 수도원 내 '비밀문서'로 기록해 두되, 실제로는 그런 일이 없었던 양 사건을 '지우는' 일이 이후 4년 동안
줄곧 그가 한 일이었다. 신과 가까이 하는 '성스러운' 일을 하고 싶은 희망, 카톨릭 교회에서 계속 그런 일을 해나갈 인물들을
키워내는 일을 하고 싶었던 그는 교회 내에서 가장 '세속적인' 일만을 해야 하는 운명으로 계속 걸어들어가게 되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자신의 역할을 통해 교회 내 비리를 척결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그는 자신의 소명을 다하려 했다. 하지만 몇 년의 기간
동안 '세속적인' 신부들로 인한 세속의 희생자들을 점점 더 많이 접하게 되면서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역할과 카톨릭 교회에
대한 신뢰를 잃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은 비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은폐하는 것일 뿐이라는 회의에 빠져들면서 더 이상 그
일을 계속할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4년 뒤 신부의 신분을 버리게 된다. 그는 다른 신부들의
타락을 덮어주는 자신의 일이 '다른 사람들의 실패를 곧 자신의 진로로 삼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신학' 학위를 가지고 세상 밖에 나와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금방 찾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공교롭게도 그가 시작하게 된
일은, 바로 성직자에 의한 성범죄 피해자들의 편에서 교회와 성직자들의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 --많은 경우-- 변호사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었다. 카톨릭 교회의 비리를 척결하는 것은, 성직자들의 비리를 조용히 지워주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들의 편에서 적극적으로
그들을 변호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방면에 있어 그 누구보다 '내밀한' 경험이 많은 전직 신부였던 그보다 그 일에
적임자는 없었다. 신부의 신분을 버린 뒤, 그 일을 하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가졌던 이 신부는, 처음 자신의 일이 소개되었던
2003년까지는 가족과 함께 교회에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 방송이 다시 소개된 올해, 그의 근황을 물어보니 수천 건에 달하는
성직자에 의한 성범죄 사건들을 접하고 또 접하는 가운데 그는 교회와 성직자들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고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정말 슬프고 우울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공감했다. 가장 '성스러운' 영역에서 살아가는 일을 택한다고 해도, 그 자체로
모두가 '성스러워질' 수는 없다. 이는 카톨릭 교회만의 문제도 아니고, 불교든 그 어떤 종교든 마찬가지다. 그리고 성스러운 일뿐만 아니라, 의사나 선생님처럼 '숭고하거나 의미있는' 일을 하는 직종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 직업 자체가 그 사람을 그
직업에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경우는 결코 없다. 오히려 그 어떤 직업을 가지더라도 세상에는 성스럽고 숭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고, 그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세상엔 숭고한 직업이 따로 있는 것도,
성스러운 직업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숭고하고 성스러운 사람, 숭고하고 성스러운 삶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일을 오랜 기간 --십 년 이상-- 하다 보면 항상 회의에 부딪친다. 내가 꿈꾸고 기대했던 길이라 생각해 어떤 직업을 택하지만
자신의 꿈과 기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대끼고 치이면서 그 일 자체에 대한 회의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어떤 직업이나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가 아닌 것 같다. 어떤 직업,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사람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만의 문제인 것 같다. 문학을 공부하고 책을 통해 세상을 만나는 일을 십 년 이상 해오면서 내가 그 일에 회의가
드는 것은, 졀대 그 일 자체가 의미가 없는 일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그 일을 하는 가장 범속한 사람들의 삶에 좌절하고 그것이
결국 그 일의 본질이자 전부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느 곳에 가더라도 결국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 일이 뭐가 됐든 그 일을 가장 숭고하게 해내는
사람은 아마 세상 어디에도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고, 내가 살면서 그런 사람을 만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다 보니, 그 일을
직업으로 삼았으되 그 일의 본질과는 무관한 방식으로 범속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부딪치는 일이 훨씬 잦고, 무엇보다 그것
때문에 회의하고 질리면서도 결국 세상이 다 그런 것이라 변명하고 위안하며 스스로도 그냥 그런 사람이 되어간다. 아마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나를 만나게 될 어떤 사람, 어떤 후배도 역시 나로 인해 그 일에 대해 똑같은 회의, 똑같은 좌절을 겪을 것이다.
나를 좌절하게 했던 그 사람이 결국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지금 내가 하는 것과 다른 어떤 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을 어떻게 다르게 해나갈 수 있느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