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화작용

under 단상 2009. 10. 7. 10:37


좋은 사람들이란, 서로에게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런 존재와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란
그것이 자연스럽게 바래갈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것을 조급하게 긁어내 버리거나, 새로운 흔적으로 덧칠해 버리지 않고.



- 본즈(Bones) 중에서


새로운 관계를 향한 끝없는 허기.
이 사람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라는 환상.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사실 내가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그 기대의 근저에 있는 내 욕망의 뿌리를 보려고 하지 않는
나 자신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그리고 누군가를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 역시도
내 허영심과 자만이 일으키는 허상인 경우가 많다.

사실은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게다가 이해하려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이 사람은 아니었지만,
다음 사람은 될 것 같아,
아니면 그 다음 사람, 그 다음 사람, ......
그렇게 그렇게 계속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빨라질 뿐이다.


누군가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내가 나를 이해해야 한다.
내가 무엇에 울고 웃고 들뜨고 처지고
화내고 슬퍼하고 갈망하고 싫증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생각이 없는 한,
그 감정의 소용돌이에 매번 '새롭게' 들어간다는 것은
기실 무의미한 반복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이번만은 다를 거야,라고 말하면서 시작하지만
매번 같은 것을 다시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의 관계가 시간의 풍화작용을 겪어
쪼개지고 바래고 흐릿해지다 흩어질 때까지
스스로가 견뎌내지 않는다면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사람으로 아무리 덧칠해도,
심지어 예전 것을 말끔히 긁어낸다고 긁어내도,
허기는 채워지지 않는다.
매번의 관계가 그저 더 큰 허기에다
더 큰 조급증만 불러올 뿐.



Posted by papy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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