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under 단상 2009. 4. 3. 23:41


가끔
내가 뭣하러 이렇게 살고 있나,
싶을 때,
내가 뭣 때문에 공부라는 걸 하고 살려고 하는 걸까,
싶을 때가 있다.
뭘 잡다하게 건드리긴 하는데,
한 가지를 들이파서 전문가가 된 것도 아니고,
평생 가도 대단한 학자 같은 게 될 거 같지도 않고,
뭐 꼭 그런 인물이 되겠다는 의지조차도 없고.

그런데 그런 공부는 절대 하고 싶지 않다거나,
그런 사람은 절대 되고 싶지 않다거나,
그래서 어떻게 공부를 해야겠구나,
어떤 사람과 함께 공부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는 종종 있다.

그건 나의 확실성, 나의 자명성, 나의 견고한 세계를
재확인하고, 사람들로부터 승인받고, 굳건히 하는
그런 공부를 하고,
그런 것을 계속 추인해주기만 하는 그런 사람들과는
벗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버릴까 무척 두렵다.

예전에는 공자가 예순이면 귀가 순해졌다고(이순) 한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너무 통속적인 이해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지금은 좀 이해가 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이를 테면, 대부분 사람들은 나이 육십쯤 되면
자기가 다 살만큼 살았고, 세상 알만큼 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이라고는 귓구멍으로 들어가지 않게 되는 것 같다.
물론 대부분 훨씬 더 일찍부터 그러지만,
소위 '육십 평생' 살면서, 운운하는 사람치고,
고집불통 노인네가 돼서 다른 사람들 말이라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힘들 거 같다.

그런데 공자는 아마도 그러지 않았다고 말하는 거 같다.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면, 여전히 귀기울여 들었다는 말 같다.
세상에 당신만 혼자 옳을 리 없다고 말하면, 귀기울여 들었다는 말 같다.
그래서 왠지 요즘은 공자를 존경하라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내가 공부를 앞으로도 계속 한다면,
나는 그렇게 나의 자명성, 내가 세운 견고한 나의 성채를
매순간 무너뜨려주는 그런 친구들을 만나는, 그런 공부를 하고 싶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배운다고 하면서, 어떤 사람의 친구라고 하면서,
당신 말이 다 옳아요,라며 그 사람의 말을 '성인의 말씀'인 양 격상시켜
스스로의 자명성을 의심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친구들과
함께 평생을 하고 싶지도 않다.

친구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내가 그르다는 것,
내가 가장 불쾌하게 여기는, 그러나 친구로서 가장 잘 아는,
나 자신의 모습을 서슴없이 말해줄 수 있기를 바라고,
공부라고 할 수 있다면, 내가 옳았다는 것을
단순히 재확인하는 증거들을 그러모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짓을 했던 것인지,
알 수 있고,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기를 바란다.

어느 순간 내가,
내 스스로 가장 원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다면
아마도 그 깨달음은 언제나 늦게 올 거 같다.
깨달음이란 늘 어떤 행위 다음에 오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깨달음을 포기할 수는 없다.
내가 친구를 만나고, 공부를 하는 데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을 뒤늦게라도 깨치게 해주는 그런 존재들이
내 곁에 있기를 바라는,
그 이유 때문일 게다.


Posted by papyrus.
,